이주민의 하나님, 바로 나의 하나님
히브리서 11:8-16, 창세기 12:1-4
우리 곁의 이주민, 우리 안의 이주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오시면서 어떤 풍경을 보셨나요? 아마 익숙한 아파트 단지와 상가들을 지나오셨을 겁니다. 하지만 그 익숙함 속에, 우리는 이미 거대한 변화의 물결 한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최신 통계는 우리가 막연히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깊숙이 다문화 사회에 들어와 있음을 보여줍니다.
대한민국, 그리고 김해의 현주소 (2025년 6월 기준)
대한민국 총 외국인 주민
0
대전과 광주 인구를 합친 것보다 많은 숫자입니다.
김해시 총 외국인 주민
0
우리 도시의 역동성을 만드는 중요한 이웃입니다.
누가 진짜 이주민인가?
우리는 이분들을 '이주민'이라 부릅니다. 하지만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훨씬 더 근본적이고 도전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이 땅에 단단히 뿌리내렸다고 믿는 우리 자신이야말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진정한 이주민은 아닐까요? '이주민'이라는 단어가, 사실은 우리 모두의 가장 깊은 영적 정체성을 설명하는 핵심 단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설교는 그 진실을 탐구하는 여정으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근본적인 진리: 우리 모두는 영적인 이주민이다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 '떠남'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이 땅에 안주하는 삶이 아닌, 약속을 따라 계속해서 나아가는 순례자의 삶을 보여줍니다. 그 출발점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의 부르심: 신뢰의 대전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이사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안전 기반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의지하라는 부르심이었습니다. 이 부르심은 세 가지 깊은 차원의 '떠남'을 요구했습니다. 아래 항목에 마우스를 올려 그 의미를 깊이 묵상해보세요.
1. 고향을 떠나
물리적 안전과 익숙함의 기반인 땅, 나의 소유를 떠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경제적 안정을 하나님께 맡기는 행위입니다.
2. 친척을 떠나
혈연, 학연, 지연 등 나를 지탱해주던 사회적 안전망을 떠나는 것입니다. 세상의 인정이 아닌 하나님의 인정을 구하는 결단입니다.
3.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나의 정체성, 유산, 자아의 가장 깊은 근원을 떠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에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정체성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아브라함의 떠남은 자신의 안전 기반을 세상에서 하나님께로 옮기는 신뢰의 대전환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매일의 삶에서 이런 영적 이주를 하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 편한 거짓말 대신 불편한 진실을 택할 때, 우리는 안락의 고향을 떠나는 것입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기로 결단할 때, 우리는 미움이라는 친척을 떠나는 것입니다. 세상의 성공 공식 대신 하나님의 방법을 따를 때, 우리는 세상의 아버지 집을 떠나는 것입니다.
광야: 이주민을 위한 친밀한 교실
'떠남'과 '도착' 사이에는 언제나 '광야'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는 결핍과 위험의 장소였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광야가 하나님의 부재가 아닌, 그분의 가장 강렬한 임재의 장소였다고 증언합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기적이 일상이 되는 곳이었습니다.
김해 이주민들의 '광야' 체험
우리 이웃인 김해의 이주민들은 어떤 광야를 지나고 있을까요? 통계는 그들 대다수가 제조업 현장에서 일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시끄러운 기계 소음 속에서 반복되는 고된 노동, 말이 통하지 않는 답답함, 긴 노동을 마치고 돌아온 좁은 방에서의 지독한 외로움, 스마트폰 화면 너머로 커가는 아이들을 봐야 하는 그리움... 이것이 그들이 매일 마주하는 현실적인 광야입니다.
이 차트는 단순한 통계가 아닙니다. 이 숫자 하나하나 뒤에는 각자의 광야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는 아브라함의 후예들, 그들의 눈물과 땀과 기도가 담겨 있습니다.
김해시 외국인 주민 주요 국적 분포
광야의 두 기둥: 만나와 불기둥
광야에서 하나님은 두 가지를 주셨습니다. 생존을 위한 '만나'와, 방향과 보호를 위한 '구름기둥과 불기둥'입니다. 오늘날 시청과 여러 기관들이 이주민에게 일자리, 교육, 의료 지원 등 귀한 '만나'를 제공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바로 그 어떤 기관도 줄 수 없는 '불기둥'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외로움의 추위 속에 따뜻한 온기가 되어주고, 절망의 어둠 속에 빛이 되어주며, 혼란스러운 삶 속에서 방향을 제시하는 관계적, 영적 공동체가 되어주는 것. 그것이 바로 광야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궁극의 이주민, 예수 그리스도
'이주민의 하나님'이라는 말이 왜 '나의 하나님'이 되는지에 대한 가장 확실하고 심장 떨리는 증거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분은 하늘 보좌라는 완전한 본향을 떠나, 죄와 고통으로 가득한 이 땅으로 친히 '이주'해 오셨습니다.
그분의 이주는 위로 올라가는 상향식 이주가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가장 낮은 곳으로 향하는 하향식 이주(Kenosis)였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여 영원한 본향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가장 사랑이 넘치는 이주를 감행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주민의 고통을 그저 머리로 이해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스스로 이주민이 되심으로, 우리의 모든 소외와 아픔과 눈물을 온몸으로 겪으신 분입니다.
패러다임의 전환: '주인'에서 '동료 순례자'로
우리가 영적 이주민임을 깨달을 때, 우리의 삶의 목표와 가치관, 그리고 이웃을 보는 시선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이 땅의 '주인'이 아니며, 도움을 주는 '시혜자'도 아닙니다. 우리는 같은 본향을 향해 가는 '동료 순례자'입니다.
| 세상에 안주하는 자 (정착민) | 영적 이주민 (순례자) |
|---|---|
| 목표: 이 땅에서의 안정과 축적 | 목표: 본향까지 신실하게 하나님과 동행 |
| 안전: 소유, 지위, 세상의 뿌리 | 안전: 하나님의 임재와 약속 |
| 도전: 나의 안락을 방해하는 위협 | 도전: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하는 '광야' |
| 정체성: 내가 사는 곳, 내가 가진 것 (Have) | 정체성: 내가 가는 곳, 나와 함께 가는 분 (Be) |
| 초점: 이 땅에 더 크고 편안한 집 짓기 | 초점: 본향 가는 길 위에 예배의 제단 쌓기 |